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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한 생각

260627_AI가 설계한 약

by oieh 2026.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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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약, 그 설계도를 그린 AI

 

오랫동안 AI 신약 개발은 화려한 발표만 무성한 분야였다. "AI로 몇 달 만에 신약 후보를 찾았다"는 보도자료는 넘쳐났지만, 정작 그 약이 사람 몸에서 효과를 냈다는 증거는 귀했다. 그런데 20256, 의학 학술지 네이처 메디슨에 한 편의 논문이 실리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홍콩의 신약 개발사 인실리코 메디슨이 AI로 설계한 분자 '렌토서팁(rentosertib)'을 특발성 폐섬유증(IPF : 원인을 알 수 없이 폐가 흉터처럼 굳어가며 숨길이 막히는 난치병) 환자 71명에게 투여한 결과, 임상 2a(투여량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나타난 것이다. AI가 주도한 약이 실제 환자에게서 가능성을 보인 첫 사례에 가깝다. 특발성 폐섬유증은 진단 후 평균 생존 기간이 3~5년에 불과한 무서운 병인데,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환자들이 손을 놓고 있던 영역이라 의미가 더 크다. 게다가 인실리코는 이 약의 표적이 되는 단백질(TNIK이라 불리는 효소)AI로 짚어내고, 그에 맞는 분자를 설계하는 데까지 18개월 남짓밖에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신약 개발을 임상까지 끌고 가는 데 평균 4~6, 수천억 원이 드는 것과 비교하면 시간을 엄청나게 압축한 셈이다.

 

가까워지지 않은 결승선, 임상이라는 골키퍼

 

숫자를 보면 흐름이 분명하다. AI가 설계에 관여한 신약 후보 중 임상시험 단계에 올라간 것이 2016년에는 단 3개였는데, 2023년에는 67개였고 지금은 173개에 이른다. 불과 10년 만에 50배 넘게 불어난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성적표다. 약물 후보가 사람에게 안전한지 처음 확인하는 임상 1상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약은 절반 남짓(52%)만 통과하는데 AI가 관여한 약은 80~90%가 통과했다. 초반 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앞서 본 인실리코의 폐섬유증 약이 임상 2a상에 다다른 것처럼, 물리 기반 설계로 유명한 슈뢰딩거의 면역질환 후보 물질은 임상 3상까지 올라섰다. AI·계산 설계 약물이 초기 단계를 넘어 후기 단계까지 줄줄이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호하기엔 이르다. 약효를 본격적으로 검증하는 임상 2상으로 가면 AI가 설계한 약의 성공률은 약 40%, 전통적인 약의 29~40%와 별 차이가 없어진다. 초반에 벌어둔 격차가 뒤로 갈수록 무색해지는 셈이다. 한 분석에서는 이를 두고 "파이프라인은 길어졌지만 결승선은 가까워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아직 미국 FDA의 정식 승인을 받은 순수 AI 설계 신약은 단 한 개도 없다. AI는 출발선을 끊는 데는 천재지만, 결승 테이프를 끊는 일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어렵지 않다. AI가 잘하는 것은 '될 법한 후보'를 빠르게 솎아내는 일이다. 화면 속에서 수백만 개의 분자를 시뮬레이션으로 줄 세우고 가장 그럴듯한 것을 골라내는 데는 사람이 절대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약이 실제로 사람 몸에서 안전하면서도 효과를 내느냐는, 컴퓨터 속 계산이 아니라 수백 명을 대상으로 한 길고 비싼 임상에서만 가려진다. 사람의 몸은 변수가 너무 많은 블랙박스이고 부작용은 수천 명에게 투약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시작이 빠르다고 끝이 빠른 것은 아니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진실인 것이다.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AI가 약을 만드는 것을 넘어, 자연의 법칙을 스스로 발견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충격적인 변화가 보인다. 단백질은 세포 안에서 온갖 기능을 수행하는 분자 기계다. 단백질은 아미노산 사슬이 복잡하게 접힌 3차원 구조에 따라 그 기능이 결정된다. 한때 이 접힘을 예측하는 것은 인류의 난제였지만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AlphaFold)가 풀어내며 2024년 노벨화학상까지 거머쥐었다. 이제 과학자들은 예측을 넘어, 자연에 없던 단백질을 백지에서 스스로 디자인하는 단계에 와 있다. 이렇게 설계한 인공 단백질은 특정 바이러스에만 달라붙는 치료제나 차세대 백신, 산업용 효소로 곧장 이어진다. 자연이 38억 년에 걸쳐 진화시킨 분자를, 이제는 사람이 단 며칠 만에 주문 제작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스로 연구하는 진정한 과학자, 멀티 AI 에이전트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러 인공지능(AI)이 각자 역할을 나눠 협업하는 멀티 에이전트(multi-agent : 각자 다른 일을 맡은 여러 AI가 서로 검증하며 일하는 구조) 방식으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설계하고 결과를 검증해 결론을 보고하는 과학 연구의 전 과정을 사람 개입 없이 스스로 돌리는 ‘Sparks‘라는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AI가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AI가 허점을 지적하고 다시 고쳐 쓰는, 연구실의 복잡한 회의 과정을 통째로 자동화한 셈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인간 과학자들도 미처 몰랐던 단백질 설계의 새로운 비밀 두 가지를 발견해 냈다. 하나는 단백질 분자를 특정 모양으로 길게 늘일 때, 일정 길이를 넘어가면 구조가 견디는 힘의 균형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단백질 구조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특정 영역에서 예상치 못하게 구조가 쉽게 무너지는 '불안정 지대'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용어는 생소할지 몰라도 핵심은 분명하다. AI가 인간이 시키는 대로 약을 '만드는' 도구를 넘어, 자연의 숨은 규칙을 직접 '발견하는' 과학자의 자리로 올라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의 발견은 천재 연구자의 직관과 수십 년 경험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AI가 가설부터 검증까지 스스로 돌리며 새 법칙을 길어 올린다면 발견의 속도 자체가 사람의 한계에서 풀려나게 된다. 한 명의 천재가 평생 할 일을, 수백 개의 AI 에이전트가 밤새 동시에 해치우는 그림인 것이다. 약 하나를 빨리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과학 생산 방식 자체의 대전환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 규제의 벽

 

판은 이미 글로벌하게 짜이고 있다. 엔비디아는 일라이릴리와 AI 신약 공동연구소를 세웠고, 앤트로픽 같은 AI 회사는 신약 스타트업을 통째로 인수하며 제약으로 진격한다. 자본과 인재, GPU와 데이터가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흐름에서 우리나라의 이름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적 수준의 병원 임상 데이터와 우수한 약대·공대 인력을 가지고도, 정작 그 데이터를 묶어 AI에 먹일 제도와 의료데이터 규제의 벽 앞에서 번번이 멈춰 선다.정부 부처마다 기준이 다르고 가이드라인마저 불투명하다 보니, 현장의 연구자들은 발이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개인정보 보호라는 명분은 정당하지만, 익명화된 데이터조차 활용 길이 막혀 있는 사이 경쟁국들은 자국 데이터를 무기로 AI 신약 엔진을 돌리고 있다. AI 신약은 데이터가 곧 무기인데, 그 무기를 창고에 쌓아두고 녹슬리고 있는 격인 것이다. 더구나 키운 인재마저 더 큰 자본과 GPU가 있는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으니, 출발도 하기 전에 선수를 빼앗기는 형국이다.

 

물론 AI가 모든 약을 뚝딱 만들어낼 것이라는 환상은 경계해야 한다. 아직 승인된 약은 단 한 개도 없고, 임상의 벽은 여전히 높다. 하지만 분명한 건 출발선이 통째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AI가 후보를 솎고, 단백질을 디자인하고, 이제는 법칙까지 발견하기 시작한 시대가 왔다. 머지않은 어느 날, 다음 노벨상이 인간의 직관이 아니라 AI가 발견한 원리에서 나온다면, 그때 우리는 관객석에 앉아 박수만 치고 있을지 무대 위에 서 있을지. 지금의 선택이 그 답을 가를지도 모른다.

 

해당 자료(AI 신약 임상) : https://sciencereader.com/ai-drug-discovery-2026/

Sparks 논문 : https://arxiv.org/abs/2504.19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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